역시, 이승환 …“복근 보여줄 게 탱크톱 입고 와”
[중앙일보 이영희] 음악을 들으며 길을 걷다 무심코 멈춰선 경험, 오랜만이었다. '미련 없이/그대를 떠나 보낸/내 마음 속엔~.' 스무 해 전쯤 사춘기를 보낸 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이 노래가, 싸늘한 가을 바람과 함께 '텅 빈 마음'을 휘감고 지나갔다. 데뷔 20주년을 맞아 기념음반을 발표한 가수 이승환(44·사진)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20년의 시간 동안 소녀팬들은 아줌마가 됐고, 그를 따라다니던 '어린 왕자'라는 호칭은 조금 민망해졌다. 하지만 팬들의 애정은 여전하다. 1집 앨범 'B.C 603' 뒷면에 찍힌 발매일 '1989년 10월 15일'에서 정확히 20년이 흐른 지난 15일, 그의 오랜 팬들은 '이승환을 사랑하는 늙은 팬'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광화문과 청담동 전광판에 광고를 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우리에게 특별한 세상을 안겨준 그대 이승환,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
◆“후배들이 부르니 100배 멋지더라”=지난 봄 만날 때, “20주년이라고 특별한 계획은 없고, 그냥 하던 콘서트나 열심히 할 생각”이라던 그였다. 하지만 그대로 보내기 아쉽다는 주변의 설득에 “괜찮은 음반 하나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27일 발매되는 기념음반 '환타스틱(Hwantastic) 프렌즈'는 한때 그의 팬이라면 가슴이 콩닥거릴 만하다. 초기 인기곡 '텅 빈 마음' '덩크 슛'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은 물론 자작곡인 '심장병' '붉은 낙타', 그리고 이번에 새로 만든 '마이 페어 레이디' '좋은 날2' 등이 담겼다.
유희열·윤건·윤도현·피아·윈디시티 등 쟁쟁한 동료·후배들이 작업을 함께 했다. '속사포 래퍼' 아웃사이더와 '클래지콰이'의 호란이 함께 부른 '심장병', 아이돌 그룹 '2AM'의 조권과 웨일이 함께한 '덩크슛' 등은 이미 음원으로 공개돼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후배들이 부담을 가질까 싶어 편곡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냥 맡겨뒀는데, 노래들이 너무 훌륭하게 바뀌었어요. '내가 부른 거보다 훨씬 좋잖아?' 깜짝 놀랐어요.”
◆“하고 싶은 음악만 한 행운아”=그의 어릴 적 꿈은 '장난감 공장장'이었다. 데뷔 후 “가수는 10년만 딱 하고 그만둬야지”라고 했다. 10년이 흐른 뒤 “아직도 왜 이렇게 못하는 게 많지? 될 때까지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소녀들의 오빠'에서 돌연 '록커'로 변신해 팬들에게 외면 받은 때도 있었고, 이혼과 사업 실패 등의 우여곡절도 겪었다. 지금 돌아보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음악만 해온 드문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만사 제치고 달려와주는, 부침 없이 곁을 지켜주는 팬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그는 자신을 '양아치'를 꿈꿔온 소심남에 비유했다. 앞으로도 쭉 록 페스티벌에 어울리는 가수로 사는 게 목표다. '이승환표 공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얘기다.
오는 12월 24~26일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리는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앞두고 요즘엔 하루 3~4시간씩 운동을 한다. “내가 무대에서 복근을 선보일 테니, 너희들은 탱크톱을 입고 와”라고 했던 오래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니, 팬들도 이제 슬슬 준비에 들어가야 할 때다.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연예 | 2009.10.19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