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도 ‘기타의 신’의 손가락을 어쩌지는 못했다. 지난 20일 저녁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제프 벡 내한공연은 ‘살아있는 전설’을 눈과 귀로 영접하는 자리였다.
예순여섯 나이에 벌인 첫 내한 공연. 영국 록 밴드 야드버즈 출신으로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등과 함께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그였기에 음악 애호가들의 목마름은 극에 달했고, 이는 공연 한달 전 일찌감치 매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제프 벡이 분신과도 같은 흰색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와 함께 무대에 오르자 객석을 가득 메운 3000여 관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는 자신의 상징이 돼버린 ‘비브라토 암 주법’과 ‘볼륨 주법’을 시종일관 기타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피크 없이 오른손 엄지로 줄을 튕긴 뒤, 나머지 손가락으로 비브라토 암과 볼륨 버튼을 만져 음의 변화를 주는 연주법이다.
특히 새 앨범 <이모션 앤 코모션> 수록곡이자 영화 <오즈의 마법사> 주제곡으로 익숙한 ‘오버 더 레인보’를 연주할 때는 한 음만 튕긴 뒤 비브라토 암 조절만으로 오르락내리락 여러 음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신기를 선사했다. 기타를 연주했다기보다는 기타로 노래를 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음악평론가 박은석씨는 “그의 기타는 때론 속삭이고 때론 흐느끼고 때론 샤우팅을 했다”며 “보컬이 없는 공연이었음에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앙코르 연주까지 마친 제프 벡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 하지만 관객은 자리를 뜨지 않고 박수를 이어갔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표곡 ‘코즈 위브 엔디드 애스 러버스’의 도입부가 서서히 울려퍼졌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애초 예정에 없던 순서인데, 그칠 줄 모르는 박수에 감동한 제프 벡이 즉흥적으로 연주를 결정한 것이다. 미리 준비한 곡이 아니어서 베이스 연주자도 없었고 원곡의 묘미를 100% 살려낸 건 아니었지만, 제프 벡과 관객들이 그 순간 나눈 감동은 원곡의 감동을 넘어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프라이빗커브 제공